필록세라(Phylloxera)
필록세라는 포도 뿌리에 감염하는 병원체로 원래 북아메리카에서 유래한 자그마한 곤충입니다. 이 곤충은 포도 뿌리에 침투하여 뿌리 형태를 변화시키고 이후 다른 곰팡이의 이차 감염을 유도하여 최종적으로는 포도나무를 죽게 만듭니다. 기록에 의하면 필록세라는 1860년경 북아메리카에서 유래하여 프랑스로 전해졌으며 19세기 말엽에 프랑스를 대표로 유럽 전역의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최근 필록세라의 전파 경로를 연구한 논문을 보면 유럽에 퍼진 필록세라가 대개 미국에서 기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감염 경로를 통해 캘리포니아와 남아프리카에 전파된 사실도 확인되었으며 캘리포니아의 필록세라가 결국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페루에까지 퍼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초기에는 필록세라 때문에 포도나무가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벌레인 데다 땅속 깊은 곳에서 뿌리에 감염하는 탓입니다. 북아메리카의 포도나무들은 필록세라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저항력이 있었던 반면 유럽의 포도나무들은 처음 만나는 진딧물에게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했습니다. 1863년 프랑스 남부 론 지방에서 시작된 필록세라의 감염은 유럽 대륙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1875년 8400만 헥토리터에 달하던 생산량이 1889년에는 2300만 헥토리터로 급감했습니다. 이 시기에 유럽 전역의 포도밭 중 70-90퍼센트가 파괴되었습니다.
미국의 포도나무를 이용한 교잡과 접붙이기
여러 가지 시도 끝에 결국은 '교잡'과 저항성을 지닌 뿌리를 이용한 '접붙이기' 두 가지 방법이 해결책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포도나무와의 접목을 통해 필록세라 감염을 방지하려는 시도는 이내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과학적 사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와인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필록세라를 처음 퍼뜨린 나라가 미국이니만큼 미국의 포도나무를 가져다가 기존 포도나무를 접목하려는 것에 대한 반발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프랑스 와인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생산자들에게는 맛도 이상한 미국 와인과 어떻게든 엮인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록세라의 위세와 피해가 계속해서 커져만 가자 결국 교잡과 접붙이기가 시도되었습니다. 교잡이란 서로 다른 포도 종의 종자를 섞어 새로운 잡종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의 원종인 비티스 라브루스카(Vitis labrusca)는 필록세라에 저항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향이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습니다. 비티스 라브루스카와 유럽 품종을 교잡함으로써 필록세라에 피해도 입지 않고 맛도 좋은 포도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잡종이 필록세라에 특별히 저항성을 나타내기보다는 가뭄이나 다른 포도 감염병에 높은 저항성을 보였고 결국 오늘날에는 널리 재배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사용이 아예 금지되어 있거나 고품질 와인에는 이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보다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된 방법은 찰스 밸런타인 라일리라는 사람이 처음 개발한 것으로 와인 생산을 원하는 포도나무의 접순을 비티스 라브루스카 등의 포도나무 뿌리에 접붙여 필록세라에 저항성을 가진 포도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필록세라로 인한 전면적인 피해는 피할 수 있었지만 기술적 안정성과 이렇게 만들어진 포도나무가 정말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귀부병
이 생물은 포도를 포함해서 다양한 과일에 감염하는 곰팡이로 쉽게 말해 빵이나 곡물 같은 주식보다는 과일 같은 후식을 좋아하는 종류입니다. 이 곰팡이는 계속 습하거나 계속 건조한 환경에서는 과일에 회색을 띠는 형태로 대규모로 감염하여 과일을 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습한 후에 건조한 조건으로 변하는 독특한 상황에서는 '귀족스러운 부패'라고 이름도 독특한 포도 감염을 일으킵니다. 한자어로는 귀부병이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 소테른(Sauternes)이나 토카이(Tokaj) 같은 고급 후식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보트리티스 시네레아는 포도 껍질을 썩게 만든 다음 포도 알갱이의 수분을 증발시켜 포도를 바싹 마르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결국 당분을 포함한 성분들을 높은 농도로 농축시켜 독특한 포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를 특별한 방법으로 발효시키면 고급의 스위트 와인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쉽지가 않습니다. 포도 경작 환경이 조금만 잘못되어도 귀부병 대신 부패가 생겨 버리며 특히 포도 표면에 벌레나 다른 이유로 상처가 생기면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두 번째로 발효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데 귀부병은 발효 중에 다른 곰팡이를 억제하는 물질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술 효모가 작동을 못하게 되고 발효 과정이 정지되어 제대로 술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소테른 와인을 마셔 보면 독특한 냄새를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귀부병에서 유래한 냄새입니다. 그래서 소테른은 냄새가 강하고 염분기가 많은 블루치즈와 궁합이 잘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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