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루아의 개념
와인과 관련해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로 테루아가 있습니다. 테루아란 특정한 지역의 특별한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토양, 기후, 지형과 농업 기술 등의 특성을 종합하여 이르는 단어 입니다. 즉 같은 포도 종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포도원에서 만들어진 와인은 바로 옆의 다른 포도원에서는 따라갈 수 없는 독특함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어인 테루아는 원래는 포도뿐 아니라 차나 커피의 생산에서도 사용되는 단어인데 번역한다면 지역의 느낌 정도가 되겠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 요인의 복합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테루아를 '와인의 생태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와인 생산과 관련된 '포도밭의 전체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최상급 포도주를 만들 때 꼭 필요한 조건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혹자들은 프랑스의 와인 생산자들이 그들의 와인을 대단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실체도 없는 데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특히 신세계 와인(New world wine) 생산자들의 경우 유사한 토질과 기후 조건이라면 같은 포도 종으로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와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신세계 와인들은 테루아와 같은 애매한 개념보다는 포도 품종 자체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테루아
테루아라는 개념은 프랑스 와인 생산자들 사이에서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같은 포도라도 다른 지역, 다른 포도원, 더 나아가 한 포도원 안에서도 다른 밭고랑마다 독특한 와인이 생산되는 것이 관찰되면서 자연스레 생겨났으며 상당히 큰 규모에서 아주 작은 규모까지 다양한 공간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르고뉴 지방의 코트 드 누이(Cote de Nuits) 전체를 하나의 테루아라고 할 수도 있고 한 포도원의 포도밭 한 줄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큰 규모에서는 지질학적인 특성이 테루아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알자스 와인 산지는 단층의 경계면에 존재하며 샹파뉴 지방은 퇴적성의 유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포메롤(Pomerol)은 제4기에 형성된 단층 지역에 쿠나와라(Coonawarra)는 고대 기저부, 나파(Napa)는 산맥의 기슭, 그리고 토가이(Tokaj) 지방은 화산으로 형성된 지대에 위치함으로써 각기 고유한 와인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르고뉴는 테루아의 개념이 매우 강한데 이는 이 지역의 역사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에는 부르고뉴 지방의 포도밭을 베네딕트회(Benedict)와 시토회(Cistercian) 수도사들이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와인을 생산하면서 이곳저곳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와인들이 서로 다른 데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한 실험과 관찰을 진행하던 중 좋은 포도와 와인을 만들어 내는 특정 포도밭들을 찾아내었고 여기서 테루아라는 개념이 굳어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수도사들이 토양의 특성을 구분하기 위해 직접 흙의 맛을 보고 그 느낌을 정리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이 농토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졌고 농민들은 자신이 소유한 조그마한 포도밭에서 독창적인 와인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이에 비해 당시 영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보르도 지방은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적게 받아 대규모 샤토(Chateau)의 유지가 가능했습니다.
테루아의 실제적 의미
테루아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실제로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포도의 작황이 좋으려면 충분한 일사량과 적당한 강수량, 배수가 잘되는 토양, 그리고 좋은 농업 기법 등이 필요하므로 이러한 요소들을 모두 만족하는 것이 결국 좋은 와인의 조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특히 일사량과 강수량은 지형적인 영향이 매우 중요해서 산 정산인지, 골짜기인지, 계곡인지, 지하수가 흘러가는지, 사면과 고도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더 나아가 토양의 영양분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네랄 향이 풍부한 샤블리(Chablis) 와인은 똑같은 샤르도네 품종이라도 부르고뉴 지방의 석회암 토양이 아니면 만들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의 경작활동, 즉 가지치기, 용수 공급과 같이 포도를 재배하는 방법이나 포도를 발효시키는 방법, 그리고 오크를 사용할지 여부 등도 각 테루아에 맞도록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어찌 보면 테루아란 동양 사상의 풍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개별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다양한 지질, 기후, 토양, 지형적 정보뿐 아니라 거기에 깃들어 살고 있는 사람의 인문학적 특성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